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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세의 오답노트/삼국지

삼국지 인물 실제 일대기, 호부견자 한당

by ボス 2021. 3. 8.

강동십이호신 한당의 실제 일대기

강동십이호신 중 한 명인 한당은 유주 요서군 영지현 사람으로, 공손찬과 같은 지역 출신입니다.

한당-출신지-현재-위치
한당-출신지

그는 오나라 인물 중에서는 보기 드문 최북방 출신인데 어떤 이유로 손견 휘하에 들어갔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손씨 가문의 3대를 책임졌던 오나라의 기둥 중 하나입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손견이 데려온 황개, 정보, 조무와 함께 첫 등장하였기에 손견의 사천왕이라 불리죠.

 

 

말을 잘 탔다는 기록이 있는데, 당시에 말을 잘 탔다는 건 큰 능력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당시 사람이라고 해서 누구나 다 말을 잘 타는 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오나라는 기병부대를 거의 특수부대에 가깝게 다룰 정도로 말을 잘 탈 수 있는 사람이 부족했던 것을 생각하면, 정사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말을 잘 탔다고 하는 것은 한당의 커다란 능력이고, 또한 손견의 신임을 받은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숙하고, 힘이 세어 손견에게 총애를 받았고, 정벌에 따라 두루 돌아다녔으며, 수차례 위험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적을 무너뜨리고 사로잡아 별부사마가 되었다. <한당전>

 

 

출신과 신분을 넘어선 자수성가

한당은 수차례 위험과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몸과 마음을 다하여 애쓰고 공을 세웠어도, 출신 때문에 승진을 하지 못했었는데, 손견이 죽은 후 별부사마로 임명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손견 사후에 그의 아들인 손책과 손권의 휘하에서도 많은 공을 세웠습니다.

 

손책이 동으로 장강을 건너 3군을 토벌하는데 따라가니 선등교위로 승진하여 병사 2천 명과 기병 50 필을 받았다.

유훈을 정벌하는데 따라가 황조를 격파, 돌아와서는 번양을 토벌하며 낙안 현장을 맡았다. 이에 산월족들이 두려워하며 복속하였다. 


후에 중랑장으로 주유 등과 함께 조조를 막아 격파하고, 여몽과 함께 남군을 습격해 공을 세우니, 편장군으로 승진하고 영창 태수가 되었다.

의도의 전역 때에는 육손, 주연 등과 함께 촉을 공격했다. 탁향에 주둔하며 촉을 대파하니, 위열 장군으로 승진하고, 도정후에 봉해졌다.

조진이 남군을 공격하자, 한당이 동남쪽을 막아내었다. 외방에서 사령관으로 있으며 장수와 병사들의 사기를 올려 한마음으로 굳건히 수비하고, 또한 감찰관을 공경히 바라보고 법령을 받들어 준수하니, 손권이 이를 훌륭하게 여겼다. <한당전>

이처럼 기록을 보면, 한당은 도적들을 힘으로 복종시킬 정도로 두려움의 상징이 되었으며, 적벽대전, 남군 정벌전, 이릉대전 등 굵직한 전투에는 모두 참전하였고, 꾸준히 승진을 하였습니다.

 

적벽대전 당시 황개가 유시에 맞아 차가운 날씨에 물속에 추락했는데, 오나라 병사들에게 구해졌지만 그들은 그가 황개인지 몰라 방치해뒀습니다. 이때 황개는 있는 힘껏 한당을 불러, 한당이 듣고 달려와 구해줬다고 합니다. 하마터면 적벽대전의 최고 공신이 방치된 채로 죽을 뻔했네요.

 

223년 한당은 도독에 임명되었고, 226년 병들어 죽게 되었으니, 그의 아들 한종이 아버지의 직위를 그대로 계승해 병사를 거느리게 됩니다.

 

 

호부견자, 개국공신의 아들은 역적?

한당이 죽은 해에 손권이 석양을 정벌하였는데, 한종에게는 부친의 상이 있으니 특별히 배려하여 무창을 지키도록 하였으나, 한종은 음란한 짓만 일삼고 법과 도리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원래라면 한종은 처벌을 받아야 했지만, 손권은 한당을 생각하며 눈감아 줍니다.

 

 

하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듯 지레 겁을 먹은 한종은 반역을 하려고 마음먹습니다.
먼저 한종은 주변에서 자신을 따르지 않을까 걱정스러워서 헛소문을 퍼트리고 자신을 따르게 만들었는데, 부친의 장사를 지낸다는 핑계를 대고, 친척의 여자들을 다 불러 모두 장수와 관리들에게 시집보내고, 총애하던 첩들은 가까운 친척들에게 주며, 소를 잡고 술 마시며 그 피를 찍어 바르며, 함께 반란에 동참할 것을 맹세합니다.

 

 

결국 아버지 한당의 관을 싣고 가족과 모친의 집안에 속한 부곡들 남녀 수천 명을 데리고 위나라로 달아났는데, 한종의 행적을 보았을 때 역적 집안이라고 아버지의 시신이 훼손될 것을 걱정했다기보다는, 위나라에 잘 보이기 위해 아버지의 관을 챙긴 것으로 보입니다.

한당은 손씨 가문에 3대째 충성하며 출신을 극복하고 꾸준히 승진할 만큼 공을 세웠습니다. 손권이 통치하는데 어려움이 있는 지역에는 주로 한당, 주태, 여몽을 보내어 다스리게 할 만큼 그 능력을 신뢰하여 맡겼고, 이 당시 육손이 믿은 장수는 한당, 송겸, 서성 정도였으니 돌연 자식 하나 때문에 부관참시 등의 명예를 훼손할만한 짓을 당할 거라고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위나라에서는 한종을 장군으로 삼고, 광양후에 봉했습니다.

 

 

252년 위나라가 오나라를 침공하여 동흥에서 크게 패배했을 때 한종은 선봉장이었는데, 이때 패하고 자신은 죽으니 제갈각이 그 머리를 베어 손권의 묘당에 아뢰었다. <한당전>

이후 한종은 수차례 오나라를 침범하고 백성들을 살해하여 손권이 증오했는데, 252년 위나라가 오나라를 침공하여 패했을 때 선봉장이었던 한종은 오나라의 정봉과 맞서고, 패하여 죽게 됩니다. 오나라에서 이 전투의 사령관을 맡았던 제갈각은 손권이 살아생전 한종을 증오했던 것을 기억하여, 한종의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손권의 묘에 가져와 위로했다고 합니다.

 

 

한당은 오나라의 개국공신이며 손씨 가문의 3대를 책임졌던 대표적인 오나라의 충신 중 한 명이지만, 그의 아들 때문에 사후가 매우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역적으로서 죽게 되고, 그 때문에 평생을 충성했던 오나라 땅에 묻히지 못했습니다.

호랑이 같은 아버지 밑에 개 같은 자식이라는 호부견자의 대표적인 예 같습니다. 자식농사는 예나 지금이나 잘된 경우를 보기 힘든 것 같습니다.

 

삼국지, 강동십이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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