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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세의 오답노트/삼국지

삼국지 인물 실제 일대기, 배신의 아이콘 맹달

by ボス 2021. 3. 2.

삼국지 인물 실제 일대기, 박쥐 같은 맹달

맹달은 처음엔 '유장'을 배신하고, 두 번째는 '유비'를 배신하더니, 세 번째에 가서는 '조예'를 배신하여 완전히 배신의 아이콘으로 찍혔습니다.

 

유장을 배신하다.

맹달은 우풍현 출신으로 자(字)는 자경(子敬)이었는데, 유비의 숙부 이름이 유경(劉敬)이었기 때문에, 군주나 자신의 조상의 이름에 쓰인 글자를 사용하지 않는 관습으로, 자도(子度)로 바꿨습니다.

 

 

맹달은 기근을 피해 동향 사람인 법정과 함께 고향을 떠나 익주의 유장에게로 갔는데, 이 둘은 유비를 도와 유비가 익주를 차지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장송이 유장에게 조조와의 관계를 끊고 유비와 함께 한중을 빼앗자고 하자, 유장이 법정과 맹달에게 각각 2천 명의 병사를 주어서 유비를 지원하게 했는데, 그 칼끝을 유장에게 돌린 것이지요.

 

 

219년, 유비는 조조를 몰아내고 한중을 손에 넣자, 맹달과 유봉에게 상용을 공격하게 했습니다. 이때 맹달은 제갈량의 매형인 방릉태수 괴기를 죽이고, 유봉과 함께 상용을 공격하여 점령하는 데 성공합니다.

 

 

 

관우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유비를 배신하다.

관우의 죽음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지만, 상용에서 원군을 보내주지 않은 유봉과 맹달도 빠질 수 없습니다.

같은 해에 관우가 번성과 양양을 포위하고 지원군을 요청했는데, 맹달은 이제 막 항복한 병사들을 동요시킬 수 없다면서 거절을 했습니다. 근데 마침 관우가 패하여 죽고 말자, 유비의 원한을 사게 됩니다. 안 그래도 공들여 키운 군악대를 유봉에게 빼앗겨서 유봉과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관우가 죽게 돼서 목숨마저 위협받게 될 것을 걱정하게 되니, 맹달은 위나라로 투항할 것을 결심하게 됩니다.

 

맹달은 유비를 존경하는 마음이 있던 건지 아니면 언젠가 다시 되돌아올 수 있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나온 겉치레인지, 유비에게 작별 편지를 쓰고 약 2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위나라로 투항합니다.

 

 

 

위나라를 배신하다.

당시에 맹달에 대한 평판은 좋았던 건지, 위나라의 황제인 조비는 "경은 혹시 유비가 보낸 자객은 아니겠지요?"와 같은 농담을 하며 환영했고, 황제만 탈 수 있는 수레, 황제만 쓸 수 있는 우산과 부채 등을 맹달에게 하사하는 등 듬뿍 사랑을 줍니다. 조비는 맹달의 외모를 "여유가 있고 우아한 기품이 넘친다." 하며 매우 좋아했고, 위나라의 안목 있는 여러 신하들도 맹달을 장수의 재목이라거나 재상의 그릇이라고 평했습니다.

 

조비는 하후상, 서황과 함께 상용 일대를 공격하여 유봉을 쫓아내고, 맹달에게 상용, 방릉, 서성 3개의 군을 합쳐 새로 만들어진 신성군의 태수를 겸하게 하여 위나라의 서남방 지역을 맡겼는데, 유엽과 사마의만은 당대의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맹달을 믿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조비는 무언가에 씐 사람처럼 아무 문제없을 거라며 맹달을 직접 보장하기까지 할 정도로 신임했습니다.

 

맹달은 이토록 조비에게 신임을 받았지만, 226년 조비가 죽고, 친하게 지내던 하후상도 이미 죽었기 때문에, 항복한 장수 출신인 데다가 이미 국경 지방에 오랫동안 머물고 있었고, 자신을 믿지 못했던 사마의가 실세가 되자, 자신이 처한 상황이 매우 불안하게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 같습니다.

 

 

이를 간파한 제갈량이 맹달에게 접근해옵니다. 또한 맹달이 맡고 있는 상용이라는 곳은 제갈량의 위나라 정벌의 핵심일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고, 특히 맹달은 자신이 배신한 것을 알고서 "제갈량이 이를 갈며 처자를 죽이려고 했다"는 말을 듣고는 "제갈량은 본말을 잘 살피는 사람이라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오."라고 답할 정도로 제갈량에게 존경심을 품고 있었던 터라, 제갈량은 이를 이용하여 접근해 온 것입니다.

 

하지만 맹달이 결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며 이랬다 저랬다 하고 있자, 제갈량은 지체되다가 사마의 등에게 제압당할 것을 걱정하여, 곽모를 신의에게 위장 잠입시켜 일부러 맹달과 모의한 내용을 흘렸는데, 평소 맹달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신의는 표를 올려 맹달이 촉나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렸습니다.

 

일이 잘못됐다고 느낀 맹달은 서둘러 군사를 일으키려고 했습니다. 이때 황제가 된 조예는 믿지 않았지만, 사마의는 맹달을 원래부터 믿지 않았기 때문에, 신속하게 군사를 일으킬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너를 믿고 있다."는 맹달을 안심시키는 편지를 보냅니다.

 

맹달은 편지를 읽고 안심하며, 서두르는 제갈량에게 "사마의가 알았다고 하더라도, 이곳까지 오려면 한 달 이상은 걸릴 것이고, 험하기 때문에 직접 오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며, 또 결단을 못 내리고 우물쭈물하며 느긋하게 망설이는데, 8일 만에 도착한 사마의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반란을 일으킵니다.

 

맹달은 전혀 사마의의 적수가 되지 못했고, 사마의가 공격한 지 16일 만에 속수무책으로 당해, 맹달의 대장 이보와 맹달의 조카 등현이 항복하며 성문을 열고 군대를 맞아들여, 맹달은 사로잡혀 참수되었으며 그 머리는 낙양으로 보내져 불태워졌습니다.

 

 

우유부단함의 최후, 배신의 아이콘 맹달

현대에 태어났어도 그 우유부단함 때문에 안 좋은 평가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여포와 다르게 욕심 때문이라기보다 처한 상황에 의해서 배신을 했다고도 느껴져서 배신의 아이콘으로 찍혀버린 건 좀 불쌍한 것 같아요. 중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에서도 신성시하고 있는 관우의 죽음에 큰 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일까요.

 

본능에 이끌려 빠른 판단을 내린, 완벽히 자기중심적인 여포.

여포의 배신은 답답한 면 없이 속전속결로 이루어졌지만, 아버지처럼 따르던 주군을 세 번 연달아 배신을 하며 패륜아로 낙인찍혔습니다. 하지만 얻고 싶은 것을 얻기 위해 고민 없이 저지르고 보는 성격이기 때문에, 상남자라고 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자기 몸을 지키는 것에 올바른 판단을 내릴 줄 아는, 통찰력이 뛰어났던 가후. 

가후의 배신은 나열하기 힘들 정도로 수많은 주군을 이용하고도 배신했지만, 도덕성 따윈 인생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듯 '삼공'이라는 높은 자리에 올라 80세 가까운 나이까지 오래 살아남으며, <인생은 가후처럼>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처세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맹달은 여포처럼 악질적인 배신도 아니었고, 가후처럼 현대에 봐도 문제가 있을 만큼 도덕성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여기저기 휘둘리기만 하다가 이도 저도 안된 그 답답한 우유부단함 때문에 배신의 아이콘이 된 것 같습니다.

 

 

맹달이 매력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또한 능력이 없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외모는 이미 눈 높은 조비가 좋아했을 정도로 잘 생겼고, 당대의 시인으로서나 음악가로서도 재능이 있었던 듯 보이며, 지휘관으로서도 실적을 올리는 등 다방면에서 재능을 보였습니다. 위나라에 투항할 때 당시 약 2만 명가량의 사병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무능한 배신자가 아니라 나름의 지위는 있던 사람이었고, 단순히 얼굴 때문에 조비가 그렇게 총애했다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군주에 대한 충성심이나 의리가 큰 가치로 여겨지는 시대에서 그 흐름을 따라가지 않았다는 것도 있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야 판단을 내리려고 하고 불이 조금 사그라들자 안일하게 있는 태도, 배신하면서도 보험을 들어놓는 태도 등이 참 야비해 보이긴 합니다.

 

 

자신의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통찰력에 기반한 처세술이 아니라 무엇을 생각하는지 눈에 뻔히 보이는 사람이 우물쭈물하는 모습은 괜히 눈에 거슬리죠. 애매한 처세술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주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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